재난 이후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서문《불의 씨앗》2026. 6. 1.

재난의 사진은 대개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로 소비되곤 한다. 피해의 규모를 증명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는 이의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이미지는 현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거리를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재난의 사진에도 고스란히 적

용된다. 불길이 치솟는 장면, 검게 탄 능선, 망연자실한 표정들. 그 이미지들이 충분히 유통되고 나면 사건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된 것이 되고, 소비된 사건은 다음 사건이 오기 전까지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아니, 다를 수 있기는 한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지 않을까. 예술 역시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시장에 걸리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재난을 소재로 삼은 예술이 결국 재난을 미화하거나 소비하는 구조를 반복한다는 비판은 타당할 수밖에 없고, 그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술이 재난 앞에 서는 일은 또

하나의 소비 행위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의 씨앗》은 이 불편한 위치에 자리한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기 전에,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먼저 질문해야만 했다.2025년 봄, 경북 일대를 가로지른 대형 산불은 수만 헥타르의 산림과 여러 마을을 휩쓸며 지나갔다. 멈출 것 같지 않던 불길이 바다 앞에서 겨우 멈추었지만, 탄 흙의 냄새와 윤곽만 남은 터, 재로 덮인 능선은 여전히 풍경 속에 남아 있다. 경북 영천에 위치한 시안미술관은 이 재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공간 가운데 하나였고, 그 근접성은 지리적 조건이기 이전에 시안미술관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윤리적 조건이 되었다.

시안미술관은 폐교를 재생한 공간이다. 교육이라는 기능이 상실된 건물이 미술관으로 다시 열리는 과정은, 소멸한 자리에서 다른 질서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시안미술관이 이미 한 번 몸으로 겪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경험은 공간의 물리적 전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교가 미술관이 되고, 미술관이 마을의 구심점이 되

고, 마을이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기까지, 시안미술관은 끊임없이 소멸의 자리에서 새로운 서사를 새겨왔다. 이러한 것들이 쌓여 시안미술관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을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 장소에 서사를 새기는 공간, 재난 이후의 경북 일대를 예술의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시안미술관 안에서 발생한 것은 그래서인 것이다. 시안미술관은 폐허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안미술관은 매년 동시대의 사회적 사건을 예술의 언어로 탐구하는 연례 기획 프로젝트를 예술통신사(藝術通信使)라는 이름으로 운영해왔다. 조선통신사가 외교의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학자, 서화가, 의원, 악사 등이 함께 이동하며 두 국가 사이의 지식과 문화를 중개한 집단적 지적 실천이었듯, 예술통신사는 작가들이 사건의 현장을 함께 찾아가고 각자의 언어로 그것을 해석하며 돌아오는 방식을 택해왔다. 통신(通信)이 ‘신뢰를 통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면, 이 프로젝트에서의 통신은

사건과 예술 사이, 현장과 전시장 사이, 기록과 해석 사이를 신뢰 위에서 잇는 실천에 가까운 것이다. 2026년, 이 프로젝트는 처음으로 ‘AT’라는 표기를 택했다. ‘Art Tongsinsa’의 앞 글자를 딴 문자이지만, 영어 전치사 ‘at’이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 특정한 상황의 지점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이 프로젝트의 방법론과 포개지면서 ‘AT’는 기호 이상의 무게를 갖게 되었다. ‘AT’가 향하는 자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일 것이라고 말이다.그래서 참여 작가들은 구체적 사건의 한가운데인 발화 지점과 피해 지역을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걸었고, 들었고, 만졌다. 재의 질감을 손으로 확인했고, 불에 탄 나무의 단면이 어떤 색인지를 들여다봤고, 그 자리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사건을 어떤 말로 설명하는지를 오래 붙들었다. 누군가는 현장에서 가져온 재료를 그대로 작업 안으로 끌어들였고, 누군가는 불이 지나간 이후의 풍경을 오랫동안 응시한 끝에 캔

버스 앞에 비로소 섰다. 재난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한 이도 있었으며, 재난 이후에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실천하고자 한 이도 있었다. 리서치가 곧 작업의 일부였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만큼이나 어떻게 보았는가가 이 전시의 성격을 결정하게 되었다.

재난 이후의 장소에서는 낯선 일들이 일어난다. 평소라면 교차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고, 제도가 미처 닿지 못한 자리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시작된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1961~)를 통해 기록하면서, 폐허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연대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불의 씨앗》은 이 관찰이 예술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소방관과 기자, 주민이 남긴 실제 기록이 작가들의 작업과 나란히 놓일 때,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미지가 함께 만들어내는 긴장 속에서 사건이 다르게 사유될 수 있는 자리가 열리는 것이다. 예술이 현실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가 아니라, 예술이 현실 ‘옆’에 놓임으로써 현실이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시작한다는 가능성, 그것이 이 전시가 구조 속에 심어둔 질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씨앗’은 두 가지 층위를 동시에 지닌다. 부주의로 시작된 불씨가 바람을 타고, 오래 말라 있던 나무들을 차례로 삼켜나갔다. 씨앗처럼 작았던 그 불씨가 능선을 넘고 마을을 가로질러 끝내 멈추지 않을 것처럼 번져나갔다. 그런데 저 먼 땅에서는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극도의 열기를 겪은 뒤에야 껍질이 열리고 발아를 시작하는 씨앗들이 있다.앗을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씨앗이 열리기 위해서는 그 열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씨앗만 한 불씨가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소멸한 자리에서 다른 관계와 질서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예술은 그 가능성이 오래 남도록 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실험한다.